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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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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문장연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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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이웃나라중국 25, 변법자강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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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
201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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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행수 |
76 |
프로그램 |
여러문장연습
(한국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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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수 |
0 |
등록자 |
rpdltidmlcndjr2
(김가민) |
스크랩수 |
51 |
등록일 |
2010/07/20 09:04: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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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 전쟁에서의 패배는 중국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중국도 개혁을 하고 일본도 개혁을 했는데 결과적으로 중국이 완패한 것은 바로 체제부터 개혁하지 않은 까닭이다. 중체서용을 표방하고 중국의 시스템은 그대로 둔 채 서양 학문 기술만 받아들이려 했으니 제대로 될 리가 있나? 중국도 일본과 같이 체제부터 근본적으로 개혁해야 한다. 체제 개혁, 즉 변법만이 중국이 살길이다. 광저우 출신의 사상가이자 정치가인 캉유웨이는 중국이 베트남을 둘러싼 프랑스와의 전쟁에 진 후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주목했다. 정치 제도를 개혁하고 나라를 뿌리부터 바꾸어야만 부국강병이 가능하다. 일본이 좋은 본보기가 아닌가. 1895년 청일 전쟁의 패배와 굴욕적인 시모노세키 조약이 조인되자 대중 운동에 앞장섰고 량치차오 등 지지자를 규합해 정치 개혁 운동에 나섰다. 캉유웨이, 량치차오, 위안스카이 등이 주축이 되어 강학회와 남학회를 조직 19종의 신문, 잡지를 발행해 서양의 정치, 제도를 소개하며 개혁이 시급함을 계몽하고 전족 폐지, 여학교 설립 등을 주장했다. 또 옌푸는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을 번역하는 등 계몽에 힘쓰는 한편 당시 황제 광서제에게 끊임없이 연명상서를 올렸다. 1889년 이후 서태후는 공식적으로 정치일선에서 후퇴하고 광서제가 친정을 시작했는데 네 살에 제위에 오른 광서제가 성년이 되자 서태후는 마지못해 친정을 허용했지만 실질적인 모든 권력을 쥐고 막후에서 조종해 황제와 대립각을 세웠다. 광서제는 독서를 즐겼고 이상주의적 성격이 강해 청일 전쟁 이후 캉유웨이의 상소에 주목했다. 1897년 황제 앞에 나아간 캉유웨이는 개혁을 강조했고 개혁의 기본 방침으로 개혁 이념 통일, 소통, 시스템 개혁 세 가지를 제시했다. 이 방침에 따라 광서제는 1898년 6월 11일 국시를 정하는 조서를 발표해 변법 추진을 공포하니 이를 무술변법이라 한다. 캉유웨이 등 개혁파, 즉 변법파는 새로운 법과 제도를 포고했는데 과거 제도를 서구적이며 근대적으로 개혁하고 서구식 교육제도를 도입해 소, 중, 대학교 전문 학교를 세우며 서구식 신식 육군을 양성하는 한편 공무원 구조조정을 통해 불필요한 인력을 감축하고 민간 상공업과 농업을 진흥시켜 서구적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활성화한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보수적 관리들은 복지부동하고 새 법은 무시되어 이루어진 것은 하나도 없고 오직 경사대학당 창립이 유일한 성과였다. 그래서 무술변법은 서류 혁명으로 끝나고 이에 불만을 품은 보수 세력에 반격의 기회만 준 결과가 되었다. 보수 세력의 중심에는 역시 서태후가 버티고 있어서 정권 탈취 기미에 위기감을 느낀 변법파는 위안스카이에게 거병을 요청했으나 위안스카이는 오히려 이 사실을 서태후에게 밀고했고 이를 빌미로 서태후는 9월 21일 쿠테타를 일으켜 광서제를 감금한 뒤 담사동 등 변법파 여섯 명을 극형에 처했다. 무술변법의 주역이던 캉유웨이, 량치차오 등은 일본으로 망명하고 복권한 서태후는 개혁안을 폐기해버림으로써 변법자강 운동 또는 무술변법으로 불리는 캉유웨이의 유신은 100일 만에 무산되고 말았다. 민중의 기반이 없이 추진한 변법 운동은 변법 운동자 스스로가 민중 운동이 아닌 위로부터의 개혁을 시도했으니 완강한 보수 세력의 벽에 부닥쳐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혁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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